[Legendary Player] 한국 배구 역대 최고 라이트 공격수 장윤창
스파이크 서브 창안해 세계 전술사에 한 획

글 최규섭 사진 홍남현

장윤창 경기대학교 교수는 ‘전설’이 품고 있는 그때 그 시절을 담백하게 되돌아봤다. 거센 파공음을 내면서 날아가 코트에 내리꽂히던 그의 강스파이크를 떠올리게 하는 거침없는 직선적 화법이었다. ©홍남현
장윤창 경기대학교 교수는 ‘전설’이 품고 있는 그때 그 시절을 담백하게 되돌아봤다. 거센 파공음을 내면서 날아가 코트에 내리꽂히던 그의 강스파이크를 떠올리게 하는 거침없는 직선적 화법이었다. ©홍남현

대한민국 남자배구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전성기를 구가했던 '태극전사 군단'의 에이스였다. 그전에도 이루지 못했고 그 후 지금까지도 밟지 못한 지평을 연 불멸의 라이트 공격수였다. 독창적으로 창출한 스파이크(스카이) 서브를 개인 전술화해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다. '돌고래'를 연상케 하는 몸놀림으로 당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그뿐이랴. 가공할 강타가 자아냈던 그때의 파공음은 아직도 귀를 먹먹하게 하는 듯싶다. 역대 최고의 아포짓(Opposite) 스파이커로 손꼽히는, 한결같이 팬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쉬는 신화 같은 존재, 장윤창(62)이다.
 

홍안의 청소년이 중심에 자리한 회오리바람, 1970년대 후반 세계 배구계를 놀라게 하다

1978년, 세계 배구계에 큰 격랑이 일었다. 한국이 일으킨 큰 파도가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9회 FIVB(국제배구연맹) 세계 남자배구 선수권 대회(9월 20일~10월 1일·이하 현지 일자)를 휩쓸었다. 배구에서, 변방이나 다름없던 한국이 4위를 차지하며 단숨에 중심권으로 진입하는 ‘이적(異蹟)’을 보였다. 4년 전, 처음 선보였던 멕시코 대회에서 13위에 불과했던 가장자리 국가 아니었던가. 세계 무대 진출 두 번째 만에 이룩한, 믿기 힘든 위업이었다. 1974년, 제8회 대회 때 3위에 올라 "아시아 배구의 주역은 나"라고 큰소리치며 우쭐해 하던 일본(11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쾌거였다. 반세기 가깝게 흐른 2023년, 지금도 그때 그 위상을 다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남자배구다. 그 뒤 가장 좋았던 성적이 두 차례 대회(1982 아르헨티나, 1994 그리스)에서 거둔 8위였다는 점에 비춰서도, 얼마나 대단한 결실을 올렸는지가 엿보이는 그때 그 순간이다.

베스트 6 가운데 하나는 홍안의 청소년이었다. 아직 약관(弱冠·스무 살)에도 이르지 못했건만 당당히 주역으로 맹활약했다. 1년 전, 고교(인창) 2년생으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장윤창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겁 없는 10대'였다. 당대 한국 배구를 주름잡던 뭇 선배들 속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마음껏 강타를 터트렸다. 이인과 함께 소화한 센터 플레이어 역 연기는 기라성 같은 세계 스타들과 견줘서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았다. 레프트에 포진한 강만수·강두태, 라이트에 자리한 정강섭, 플레이를 조율한 세터 김호철 등과 어우러져 공수에서 완벽한 몸놀림을 펼쳤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을 쟁취했던 폴란드도 막내인 그를 내세운 한국의 파격적 베스트 6 운용에 넋을 잃고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제2차 라운드(준결승리그)에서 한국을 만나 1-3으로 나가떨어졌다.

"두려움이 없던 시절이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 나간 세계 대회였던 점이 오히려 득이 되지 않았나 싶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전혀 몰랐기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고 나 자신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던 듯싶다. 형들도 '선입견 없이 네가 지닌 모든 기량과 힘을 쏟아부으라'고 격려해 줬다."

1년 뒤, 그는 만개했다. 세계 정상에 우뚝 선 태극 군단의 선봉장으로, 눈부신 자취를 멕시코시티 하늘에 수놓았다. 1979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1년 전 세계 선수권 대회 준결승리그(2-3)와 3·4위전(1-3)에서 맞붙어 그때마다 쓰라린 패배를 안긴 쿠바를 따돌리고 올린 개가여서 더욱 뜻깊은 금자탑이었다. 물론, 한국 배구가 세계 무대에서 이룬 최초의 우승이었다.

3개월 뒤, 그는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인생 경기'를 치렀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겸해 열린 1979 아시아 선수권 대회가 그 무대였다. 두말할 나위 없이 주인공은 그였다. 한국 남자가 처음으로 일본을 꺾는 감동의 순간을 연출하는 데 앞장섰다. 최종 라운드(결승리그) 첫판에서 빚어낸 대역전극이었다. 1, 2세트를 빼앗긴 뒤(11-15, 8-15) 내리 3세트를 따내며(15-9, 15-11, 15-7) 승전고를 울린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역을 빼어나게 연기한 그였다. 한 해 전,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때 금맥을 캐면서도 일본에 쓰라림(1-3)을 맛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더욱 통쾌함을 만끽할 수 있었던 역대 일본전 최초 개가였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서로를 껴안고 환호하며 솟아오르는 감격으로 눈시울을 적셨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뭉클해진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우러진 데서 빚어진, 오랜 세월 쌓인 체증을 말끔히 가시게 한 시원한 한판승이었다. 개인적으로, 역대 최고의 전력을 구축했던 국가대표팀이 아니었나 싶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완벽한 조직력이 일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격-블로킹-수비에 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베스트 6를 짰을 만큼 막강 전력을 쌓았던 당시 국가대표팀이었다."

그때 멤버는 지금도 하나의 모임을 이뤄 만나며 변함없는 우의를 다진다. 이들의 만남터인 ‘78·79 대표선수 모임회’(회장 정강섭)에서, 그는 가교 역인 총무를 맡고 있다.

 

©홍남현
©홍남현

만능 스포츠 소년, 뜻밖에 배구와 인연… 세계 판도에 지각 변동 일으킨 한국의 주역

소년은 스포츠에 만능이었다. 기본 종목인 육상을 비롯해 축구와 핸드볼 등 구기 종목에서도 빼어난 자질은 단연 돋보였다. 초등학교(안양) 5~6학년 시절, 육상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단거리를 필두로 높이뛰기와 멀리뛰기 등 여러 종목에서 발군이었다. 핸드볼 실력은 제1회(1972년) 전국 소년체육대회에서 메달을 땄을 정도로 뛰어났다. 어린 나이인데도 곧잘 드라이브 중거리포를 터뜨리는 주득점원이었다. 중(안양) 1년 시절엔, 축구에서도 GK로서 잠재력을 분출했다. 1980년대, K리그를 풍미하며 국가대표로서도 성가를 드높인 정해원이 그와 한솥밥을 먹던 동기생이었다.

"무척 뛰어났던 점프력이 여러 종목에서 우위를 보이는 데 바탕이 된 듯하다. 각 종목 지도자가 서로 데려가려고 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웃음)."

배구 입문은 뜻밖이었다. 선배들의 기합에 염증을 느껴 운동선수 길을 포기하려 했던 소년, 장윤창에게 생각지 않았던 손길이 다가왔다.

"한 선생님(오희석)이 배구를 권유하셨다. 탄탄한 점프력은 물론 체공력이 그분의 눈에 들었던 것 같다. '배구 선수로서 대성할 자질이 엿보인다'며 최창곤 송산중 감독님에게 추천해 주셨다. 나 자신도 왠지 마음이 이끌렸다."

배구와 맺은 천생연분은 이렇게 비롯했다.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학교를 옮겼다. 중학 무대에서, 4강권에 포진해 배구 명문으로 이름을 떨치던 송산중은 그에게 더없는 배움터였다. 비로소 그에게 한국 남자배구의 장밋빛 미래를 이끌어 갈 비약의 나래가 돋치기 시작했다.

"천부적으로 배구 자질을 갖고 태어난 것 같다. 오래지 않아 주전을 꿰찼다. 세터와 함께 라이트 공격수로서도 주어진 역을 잘 소화했다. 그래서 최 감독님은 나를 더블 세터 겸 라이트로 포진했다. 양손을 다 잘 쓰는 내 강점을 활용한 용병술이었다. 왼손 공격수가 희귀하던 시절이어서, 오른손 못지않게 왼손에 능한 나를 오른쪽에 배치했다. 또한, 센스를 갖춘 데다 토스 질이 좋은 점을 살리기 위해 세터 역도 맡기셨다."

싹을 틔운 그는 고교 무대로 올라가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대신고와 함께 고교 판도를 양분하던 인창고에서, 그는 일찌감치 1학년부터 주전 공격수였다. 이때 청소년대표로 발탁되며 처음 태극마크와 연(緣)을 맺었다. 2학년 때인 1977년, 제1회 브라질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5위의 지각 변동을 일으킨 한국의 진앙엔 그가 있었다.

그해 말, 그는 역대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국가대표팀에 뽑혔다. 최연소는 최장수로 이어졌다. 1991년 8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지역 예선을 겸해 열린 아시아 선수권 대회까지 만 14년간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 온 힘을 쏟아부었다. ▲ 1978 이탈리아 세계 선수권 대회 4위 ▲ 1979 멕시코시티 유니버시아드 금을 비롯해 ▲ 1984 LA 올림픽 5위 ▲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금 ▲ 1989 서울 아시아 선수권 대회 우승은 그 값진 결실이었다.

"1988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태극 유니폼을 벗으려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배구협회(KVA)가 '계속 뛰어 달라'고 간곡히 권유했다. 고심 끝에 '조국에 더 봉사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마음가짐이 3년 동안 더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

 

장윤창 교수가 경기대학교 배구팀 선수들과 어울려 나누는 담소에선, 진한 사제의 정이 엿보였다. ©홍남현
장윤창 교수가 경기대학교 배구팀 선수들과 어울려 나누는 담소에선, 진한 사제의 정이 엿보였다. ©홍남현

스파이크 서브를 창안해 세계 배구 전술사의 한쪽을 장식

금세기 들어 스파이크 서브는 공격 전술의 하나로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남자 선수는 물론 여자 선수도 대부분 스파이크 서브를 구사한다.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호쾌한 강서브로 공격의 물꼬를 트곤 한다.

이 맥락에서 볼 때, 장윤창은 세계 배구 전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가 스파이크 서브를 창안했기 때문이다. 이설(異說)이 있긴 하다. 그러나 적어도, 개인 공격 전술로 운용한 점에 있어선, 그가 효시임은 뚜렷하다. 그는 돌고래처럼 솟아올라 상대 코트 곳곳을 강력하게 파고드는 스파이크 서브로 매 경기 몇 개씩 서브 에이스를 올리곤 했다.

스파이크 서브 탄생 배경엔, '우연한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1978~1979년 눈부신 전과를 올린 그에게 당연히 '구애의 손길'이 다가왔다. UAE(아랍에미리트) 알자지라 클럽이 대표적으로,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파격적 영입을 제안했다. 3개월에 20만 달러였다. 당시 아파트 8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가 없는 국가대표팀을 상상할 수 없는 KVA는 이 사실을 숨기고 조용히 넘어가려 했다. 그렇지만 한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서,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그는 훈련 중인 국가대표팀에서 이탈해 낚싯대만 둘러매고 강원도 한 어촌으로 떠났다. 백방으로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온 KVA 관계자들은 사과하며 "마음을 돌려 달라"라고 간곡히 설득했다. 결국, 그는 '말 없는 항거'를 끝내고 국가대표팀에 돌아왔다.

"1980 아고 디나모 국제 대회를 앞두고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때 치른 친선 경기에서, 처음 스카이 서브를 선보였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장난(?) 삼아 시도해 봤다. 그런데 뜻밖의 높은 효과에, 상대는 물론 동료들도 깜짝 놀랐다. 겉으로 나타내진 않았으나, 나 자신도 그랬다."

오른쪽에서 터뜨리는 고공 강타와 백 어택에 스파이크 서브를 더한 그는 이어 열린 아고 디나모 대회에서 펄펄 날았다. 태극 군단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대회가 끝난 뒤 귀국한 그는 우승의 여운을 음미할 새도 없이 스파이크 서브 훈련에 매달렸다. 소속(경기대) 팀 훈련이 끝나면, 따로 야간 개인 훈련을 소화하며 수백 개씩 스파이크 서브를 때렸다. 그가 갈고닦은 스파이크 서브는 시나브로 완성도가 높아지고 위력이 강해졌다. 그해(1980년) 말 열린 종합 선수권 대회에서, 그가 선보인 스파이크 서브에, 팬들은 열광했다. 언론에서도 '돌고래 서브'라고 대서특필하며 집중 조명했다.
 

후학 양성과 사회봉사에 온 힘 쏟는 삶의 철학은 오늘도 왕성히 숨 쉬어

국내 배구사에서도, 장윤창은 뜻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1984년, KVA는 그의 폭발적 인기를 등에 업고 페넌트 레이스로 펼쳐지는 대통령배 대회를 창설했다. 새 지평을 연 출범으로, 프로화의 첫걸음이었다.

이 대회는 그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국가대표팀에 묶여 있지 않을 때, 그가 몸담은 둥지인 고려증권은 천하무적이었다. 팀 재정상 선수층이 얇았던 고려증권이었지만, 그가 출장한 경기에서만큼은 적수를 찾기가 힘들었다. 실업 선수 시절, 그는 고려증권에서만 외길을 걸었다(1983~1994년). 자신을 디딤돌 삼아 창단(1982년 4월)하고 대학 4학년 때부터 월급을 지급한 고려증권과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팀에 다섯 번씩이나 우승의 영광을 안겼다. 특히, 첫 대회와 10회(1993년) 대회에서, 전승 우승을 일군 주역으로 맹활약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이제는 깨려야 깰 수 없는 인상 깊은 기록을 세웠다. 경기장을 찾은 팬들의 현장 투표로 뽑는 인기상을 첫 대회부터 4회 대회(1987)까지 내리 독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를 향한 팬들의 한결같은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다.

1993~1994시즌 유종의 미를 거둔 그는 은퇴했다. 이미 1987년부터 플레잉 코치로 활약했던 그의 앞날엔, 지도자의 길이 활짝 열릴 성싶었다. 하지만 그는 미지의 길을 택했다. "학업에 정진하고 싶다"라는 뜻을 밝히고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 1994년 9월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그는 조지 워싱턴대학교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다가 암초에 맞닥뜨렸다. 외환 유동성 위기(IMF)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한 그는 국민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박사 학위 논문이 '한국 프로스포츠의 복지정책에 대한 현황 및 발전 방안 연구'일 만치 줄곧 스포츠 마케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05년, 그가 한국 프로배구(V-리그) 출범에 주역이 된 밑바탕이었다. 2003년부터는 경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의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힘이 다할 때까지 대한민국 국민으로부터 받은 큰 사랑과 성원에 보답하는 길을 걷고 싶다."

그는 이 바람을 구현하기 위해 여러 봉사 단체를 만들어 소외계층에 따뜻한 손길을 펼치고 있다. 한국 스포츠를 빛냈던 각 종목 스타들로 구성된 ㈔함께하는 사람들과 국가대표선수협회는 모두 사회봉사 단체로 사회의 구석진 곳을 비추고 보살피는 데 열과 성을 다한다. 그가 주도해 결성한 단체들이다. '성실·인내·겸손'을 좌우명으로 삼고 늘 온 힘을 다하는 그의 삶의 철학은 오늘도 살아 숨 쉬며 빛나고 있다.

저작권자 © 생활체육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