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PLAYER 1980년대 불멸의 기록 남긴 최강 복서 김광선

김광선 관장의 복싱 사랑과 열정은 미소를 띤 얼굴에서도 배어 나온다 ©홍남현
김광선 관장의 복싱 사랑과 열정은 미소를 띤 얼굴에서도 배어 나온다 ©홍남현

211전 210승 1패. 140승을 KO(RSC 포함)로 장식하며 거둔 전과다. 믿기 힘들다. 더구나 복싱 최경량급인 라이트 플라이급(-48㎏·이하 당시)과 플라이급(-51㎏)에서 이렇게 엄청난 펀치력을 뽐냈다니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적수가 없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양 끊임없이 상대를 몰아붙여 사각의 링을 지배한 무적의 복서였다. 1980년대 세계 아마추어 복싱 경량급 최강자로 군림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라이터돌’ 김광선(58)이다.
 

올림픽 금을 비롯해 1980년대 중·후반 전 세계 플라이급을 평정

1988년 10월 2일, 김광선은 잊을 수 없는 한순간을 맞이했다. 1981년 글러브를 낀 이래 41년간 걸어온 복싱 삶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추억으로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자취다. 그토록 염원했던 올림픽 금을 결실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서울 올림픽 복싱 마지막 날 경기가 펼쳐진 이날, 김광선은 플라이급 최강자로서 포효했다. 플라이급은 그의 독무대였다. 1~2차전을 RSC승으로 손쉽게 넘어서며 독장(獨場)치는 그의 기세를 꺾을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여섯 번째 마당인 결승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안드레아스 테스(동독)를 4-1로 가볍게 물리치고 정상에 우뚝 섰다.

시상대 맨 위에서, 그는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맞춰 올라가는 태극기를 눈시울을 붉힌 채 바라봤다. 그의 눈앞을 4년 전의 쓰라린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1984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은 그에게 첫 올림픽 무대였다. 이미 1983 로마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그는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신은 그를 외면했다. 1차전에서, 그는 홈링의 폴 곤잘레스에게 ‘뜻밖에도’ 판정으로 졌다. 복싱과 연(緣)을 맺은 뒤 승승장구하던 그가 맞닥뜨린 첫 시련이었다.

“로마 월드컵 8강전에서 미국의 호세 로사리오를 꺾었다. 곤잘레스도 그전에 맞붙었을 때 이겼던 상대였다. 그런 내가 복싱 종목 우승을 노리던 미국엔 눈엣가시였던 듯싶다. 지금도 그때를 되돌아보면 사전에 짜인 각본대로 나온 결과였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아 쓴웃음만 나온다. 그만큼 분했고 허무했던 패배다. 아마추어 시절 당한 유일한 패배가 바로 그 경기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승부의 세계에서 패배는 피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마음가짐을 새로이 했다.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플라이급으로 한 체급 올리며 더 많은 땀을 쏟아부었다. 신도 그의 정진에 감복했는지 시험을 거둬들였다. 신은 미소를 지으며 절치부심하는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2년 뒤, 새 과실이 열렸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플라이급 주인공은 그였다. 결승전에서, 그는 샤후라이 비라이다르(인도)를 물리치고 서울 하늘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2년 뒤 올림픽 금 농사를 기약하는 씨앗 뿌리기였다.
 

김광선 관장이 샌드백을 몸소 잡아 준 채로 제자에게 펀치를 날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홍남현
김광선 관장이 샌드백을 몸소 잡아 준 채로 제자에게 펀치를 날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홍남현

두 번의 세계 타이틀 매치, 그러나 이루지 못한 프로 챔프의 꿈

“‘자질을 타고났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김광선의 복싱 자질은 천부적이라 할 만하다.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두들긴 지 1년 만에 국가대표에 발탁됐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 그는 한양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81년 복싱에 입문했다. 당시 중구 을지로에 있던 한국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한국체육관은 복싱을 비롯해 유도와 레슬링 등 여러 격투 종목을 개설해 가르쳤다. 그중 복싱의 매력이 단연 으뜸으로 다가왔다.” 이듬해 태극마크를 단 이래 1988년 은퇴(아마추어)할 때까지 줄곧 국가대표로서 국위를 선양했다. 그가 각종 메이저 국제 무대에서 남긴 발자취는 화려하다. 1983 로마 월드컵,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8 서울 올림픽 등을 휩쓸며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표 참조). 링에 오르면 굶주린 맹수처럼 쉴 틈 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며 공략한 데서 나온 대단한 수확물이다.

로마 월드컵 우승은 지금도 그에게 또 하나의 각별한 기억으로 간직돼 있다. 한국 복싱 월드컵 사상 첫 금의 소중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 라이트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그는 베이부트 에스자노프(소련)를 판정으로 꺾는 기염을 토했다. 준결승전에서 다친 오른손등이 부어올라 마취제를 맞고 경기한 끝에 올린 개가라, 더욱 소리 높여 부를 수 있었던 승전가였다. “비록 그 대회 부상으로 1년 가깝게 고생하긴 했어도, 한국 복싱사에 기록된 기념비적 우승이어서 마음은 하늘을 훨훨 날아갈 듯했다.”

그는 서울 올림픽의 영광을 뒤로하고 곧바로 은퇴한 뒤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국군체육부대 복싱 코치(5급 군무원)로서 후학 양성에 나섰다. 지도자로서도 역량을 뽐냈다. 1990 베이징(北京)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7체급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3년 동안 지도자로서도 빛나던 그는 돌연 방향을 틀어 다시 링에 뛰어들었다. 이번엔 프로 무대였다.

“지도자의 고충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선수 시절보다 더 스트레스가 심했다. 오죽했으면 못 피우던 담배를 입에 댔을까.”

아마추어 세계 최강이었던 그의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4KO승(2TKO 포함)을 거두며 5연승을 내달렸다. 2전 만에 세계 랭킹 4위로 올라섰을 정도였다. 링으로 돌아온 지 1년이 흐른 1992년 6월 7일, 그에게 마의 손길이 뻗쳐 왔다. 움베르토 곤살레스(멕시코)와 맞붙은 WBC(세계복싱평의회)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 매치에서, 불운의 싹이 텄다. 그에겐 프로 데뷔 여섯 번째 만에 치르는 세계 타이틀전이었다. 그는 챔피언을 농락하며 경기를 압도했다. 그러나 마지막 12라운드에서 역전 TKO패로 물러나는 쓴맛을 봤다. 화려한 승리를 원한 트레이너의 “계속 몰아붙여라”라는 닦달이 부른 화였다.

올림픽 지상주의를 내세운 국가 시책에 따른 뒤늦은 프로 데뷔와 체중 감량이 중요한 고비에서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1984년부터 플라이급으로 뛰던, 그리고 우리 나이 스물아홉 살의 그로선, 라이트 플라이급에 맞춘 체중 감량에 따른 급격한 체력 저하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이듬해 다시 한번 세계 챔프 등극의 기회를 맞았다. 이번엔 WBC·IBF(국제복싱연맹) 양 기구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 매치였다. 상대인 챔피언은 서울 올림픽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을 땄던 마이클 카바할(미국)이었다. 역시 초반엔 그의 페이스였다. 하지만 7라운드 카바할의 레프트 훅에 쓰러지며 승자의 미소를 양보해야 했다. 비운의 마지막 경기였다. 그는 이 한판을 끝으로 은퇴했다.
 

1888 서울 올림픽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광선(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시상대 맨 위에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김광선 복싱체육관을 장식한 수많은 기념물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사진이다 ©홍남현
1888 서울 올림픽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광선(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시상대 맨 위에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김광선 복싱체육관을 장식한 수많은 기념물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사진이다 ©홍남현

‘생활 복싱 전도사’로서 오늘도 열정 불사르며 복싱이 꽃필 그 날 염원

김광선은 오뚝이였다. 다시 일어나 앞으로 밟아 나가야 할 인생 항로를 곰곰이 되씹었다. 그가 찾은 묘방은 생활체육 복싱이었다. 1996년 9월부터(~2009년 8월) 육군사관학교 복싱 교관으로 활동하며 단초를 찾은 처방전이었다. 1998년 9월, 그는 새로운 인생의 막을 올렸다. ‘인생 2막’은 김광선 복싱체육관(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 창설로 비롯됐다. 이 땅에 생활체육 복싱을 뿌리내리리라 다짐하며 내디딘, 체육관 관장으로서 첫걸음이었다. 24년이 흐른 오늘 돌이켜 보면 한국 생활 복싱사의 한 쪽을 장식할 만한 뜻깊은 첫출발이었다.

“복싱에 대한 선입견을 타파하고 싶었다.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생활체육의 하나로서 복싱의 효용가치를 입증하려 했다. 목표를 명확하게 세웠던 데 힘입어 흔들리지 않고 한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는 낡은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세계를 휩쓸던 실력만을 앞세우거나 경험에 얽매이지 않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를 끊임없이 되뇌며 새 틀의 바탕이 될 이론 정립에도 힘썼다. 복싱 다이어트와 복싱 에어로빅은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내놓은 작품이었다. 1999년 1급 경기 지도자 자격증(복싱) 취득 때 쓴 논문 주제는 생활체육으로서 복싱 다이어트와 복싱 에어로빅의 효용성이었다.

그가 20여 년 동안 쏟아부은 열정은 복싱이 생활체육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춧돌이 됐다. 오랜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그가 ‘생활 복싱 전도사’로서 추구한 방향성은 옳았음이 입증되고 있다. 갈수록 생활체육의 중요성을 깨닫는 현대인에게, 생활 복싱이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추세가 두드러지게 엿보이는 오늘날이다. 객관적으로도 나타난다. 그동안 그의 손길을 거쳐 간 제자는 수만 명에 이른다. 정계·경제계·연예계를 비롯해 사회 곳곳에 포진한 제자들이 골골샅샅에 즐비하다.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대를 이어 그의 문하생이 된 부자도 있다. 그런 그에게 붙은 또 하나의 별호는 ‘영원한 전국구 스승’이다. 지금도 매년 스승의 날이면 김광선 복싱체육관은 스승의 은혜를 되새기며 전국에서 찾아온 제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복싱 단증 제도 도입’은 그가 빚어낸 또 하나의 걸작품이다. 그는 태권도나 유도 등 다른 격투기 종목에서나 볼 수 있던 이 제도를 2010년 도입해 운용해 오고 있다. 생활 복싱을 즐기는 이들에겐, 타성을 없애고 신선한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강점을 지닌 유용한 제도로 받아들여진다. 1~9단까지 있으며, 보통 승단에 1년 정도가 소요된다. 경찰무도복싱협회도 수년 전부터 이 제도를 수용해 시행하고 있다. 공인 경찰 무도 복싱 단증을 발급하고 경찰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가산점을 부여하는 혜택을 주고 있다.

그가 한결같이 불사른 복싱 정열은 아내(신승연·54)를 복싱의 길로 나아가게 한 밑바탕이 됐다. 결혼 전까지 전혀 복싱을 몰랐던 아내는 지금은 어엿한 베테랑 심판으로 활동할 만큼 복싱과 깊은 연을 맺고 있다. 부창부수의 복싱 사랑은 두 열매를 맺은 밑거름이 됐다. 망상 대학생 동아리 복싱대회와 동대문구청장배 복싱대회는 부부의 심혈이 깃들어 태어난 생활체육 무대다. 두 무대 모두 스무 해가 넘는 연륜이 쌓이며 전국 규모 대회로 성장하며 생활 복싱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앞만 보고 걸어왔다. 어제를 돌아봄은 내일의 영양분으로 쓰려는 데에서였을 뿐이다. 현실에 만족할 때 도태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마음가짐을 늘 다지고 다졌다. 복싱이 생활체육의 중심축으로 자리할 그 날까지 뛰고 또 뛰려 한다. 지켜보며 격려해 줬으면 좋겠다.”

생활 복싱 개척자로서 그의 소망은 한결같다. 복싱이 생활체육으로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작은 밑거름이 되겠다는 소박한 신념으로, 그는 오늘을 살며 내일을 연다.

■ 김광선 프로필

출생 연도 1964년

출생지 전라북도 군산시

학력 군산 남초등학교→ 동북중학교→ 한양공업고등학교→ 동국대학교

국가대표 활동 1982~1988년

전적 아마추어 211전 210승(140KO·RSC 포함) 1패 프로6전 4승 2패

주요 수상
1983 로마 월드컵 금(라이트 플라이급), 1886 서울 아사인게임 플라이급 금
1988 서울 올림픽 플라이급 금

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저작권자 © 생활체육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